애니,책을 보는데 문득!

사기를 보려는 분들을 위한 Tip 몇가지 2

베리알 2011. 9. 12. 17:30



  심심한 김에 남겨 보는 기억력 보충의 편린...

 지난 번에 이은 사기 Tip 두번째다. 아마 마지막일득? ^^


 킹덤 열전에서 아마 계속 이야기한 것 같은데, 내가 사기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작성자가 유교에 찌들었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간단한 것 같지만,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반공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절대 잣대였던 얼마전까지의 한국에서는 공산주의고 사회주의고 간에

언급한다는 것조차 어려웠었으니 그런 분위기에서 역사에 대한 진정한 고찰이 이뤄질리 만무하다.

 기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절대 잣대였던 옛유럽에서는 믿음의 자유니 성경의 오류나 하는

이야기는 목숨을 걸지 않으면 할 수 없었다. 이때는 이교도가 아니라 이단이면 죽던 시절...

 독재자가 지배하는 독재국가에선 독재자에 대한 지적조차 불가능하다.

 위와 같이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잣대가 절대적으로 군림하는 곳에선 제대로 된 발전이

이뤄질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동양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흔히들 서양의 기독교 군림에 대해선 얘기들을 하지만(한손에 코란, 한손에 칼을 들고

믿음을 강요하는 이슬람의 이미지지만, 이는 기독교에 의해 왜곡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

나쁜 세뇌다. 실제로 믿음이냐 죽음이냐를 강요하던 건 기독교지, 이슬람 쪽은 그보다

훨씬 더 유연하고 현실적이었다) 동양의 유교 군림에 대해선 별 얘기가 없다.

 역시 길고 긴 세월의 유교 군림의 역사가 있었고, 그 영향이 아직 남아 있어서일까.

또는 유럽의 종교 개혁 같은 큰 난리가 없어서일까.

 어쨌거나 중요한 건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유교의 군림이 동양에서 있었다는 것이고,

이때의 폐해는 서양의 기독교 악습 에피소드들에 지지 않는 막장들이 많았다.

 교회의 권위에 성경의 이야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던 것처럼,

유림의 권위에 유교 경전의 이야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던 건 정치싸움에서나 가능하지,

(그러고보니, 유교의 학파들이 주도권을 놓고 끊임없이 다투던 게 일종의 종교개혁이었을까? ^^;;;)

일반적으로 이는 허용된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연장자나 상급자와는 건설적인 토론이 절대 불가능하고 무조건 주입만 받아야 하는,

어른이 말을 하는데 어디서 말대답이야!...가 당연하던 시절을 떠올려 보라. ^^)

 교회나 야훼에 대해 잘못 말했다가 죽은 이야기들처럼, 유교에 대해 잘못 말했다가 죽은 이야기들이

동양에도 있었다.


 사마천은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유교라는 절대적 힘이 존재하기 이전의 사람이었기에,

사마천의 사기는 이후의 어떤 역사서들과도 차원이 다른 존재 가치를 빛내게 되었다.

 후대 역사가들 중에는 그저 유교의 편협한 시각만으로 재단해서 사마천을 비난하는 찌질이들도

있었을 정도로(예를 들어, 사마천이 도교나 유교 등에 대해 장단을 평가해 놓은 것을 놓고,

어디서 감히 유교를 비방하냐는 식으로...) 이후 역사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중국은 유교에 점령당하게

되고 사마천 이후의 역사서들은 모두 이런 한계를 벗어나지 못 했다.

 만약에 사마천이 중국이 이미 유교가 점령된 후에 태어나 역사서를 만들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난 유교를 싫어하기도 하지만(당연하지만, 유교의 전부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유교를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떠나서 특정하고 편협한 가치관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싫어한다. 그래서 반공, 발전지상주의등 가진자들을 위한 세상을 거쳐 오고도

아직도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천민자본주의의 가치관의 구렁텅이로만 빠져 들고 있는

작금의 한국의 모습은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 이미지 출처 : www.kyobobook.co.kr >


(사기 얘기니 지난 번에 이어 그냥 이 이미지를 가져왔을 뿐, 별다른 의미는 없다.

그러고보니, 이 완역사기본기는 아직도 2권 소식이 없네...)





-사마천은 유교까다?

  아마 이후의 유교에 찌들은 역사가들에 의한 이상한 흠잡기 등의 영향으로,

사마천은 유교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고 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또, 내가 매번 사마천은 유교에 찌들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서 유교를 싫어했나보다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전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사마천은 유교에 찌들지 않았던 것 뿐이지 유교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사마천에게 유교는 존중의 대상이면서 또한 그 장단을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거기에

맹목적으로 매달리거나 종속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자연스러운 모습조차

유교에 찌들은 후대 역사가들에게는 불경 그 자체였을뿐...

 사마천이 유교를 싫어하기는 커녕, 존중했다는 것은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단, 사기 열전의 적지 않은 부분을 할애해 유교와 그 인물들에 관해 서술하고 있으며,

사기에서 나오는 사마천의 표현에서도 유교를 모함하는 경우는 없다.

 무엇보다, 역사의 중요도에 있어서 황제의 본기 다음인 세가...

 황제의 나라 이외의 나라들의 역사를 담은 이 세가에는 나라가 아니라 사람으로서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올라 있기도 한데, 그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바로 공자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공자는 사실 객관적으로는 그저 사기 열전에나 나와야할 정도로 생전에 별볼일 없는 인물이었지만,

사마천은 공자와 유교의 영향력을 생각해 그를 무려 세가에 넣어 놓은 것이다.

 사마천이 공자나 유교를 업신여겼다면 이런 파격적인 배치는 어불성설인 것...

 (예를 들어 세가에는 진나라의 폭정에 난을 일으켰던 진승과 오광의 이야기가 진섭세가로 실려 있는데,

이는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도화선에 불을 붙인 역사적 사건이었던 바, 그 의의를 납득할 수 있지만,

공자는 그런 역사적인 사건도 없었다)

 게다가, 공자 세가의 말미에 사마천은 공자를 최고의 성인이라고 직접 찬양하고 있다.

 치켜세우는 첫 하면서 사실은 사정없이 내려치는 고도의 XX까라는 표현도 요즘에 나왔던데,

이런 것과도 전혀 관계없이 정말로 사마천은 공자를 칭송하고 있다.

 

 그저, 자기가 유교라는 괴물에 찌들어 있는지도 모르고 편협하고 한심한 시각으로

사마천을 헐뜯었던 후세의 무지몽매한 것들을 탓해야할뿐...





-사기는 한나라 때 씌여졌다?

사기는 전한시대 끄트머리, 한무제 때 씌여졌고 연도상 기원전 90년+- 정도로 본다.

사기가 한나라 때 씌여졌다는 건 너무나 당연하지만, 이 의미는 상상 이상이다.

 사마천이 타임머신으로 타는 것도 아니고, 고대부터 한나라 때까지 살아오던 하이랜더도 아닌 이상,

제 아무리 사마천이 자료를 모으고 유적들을 탐사했어도 그 자료들은 사기가 만들어지면서

한나라(정확히는 전한)의 필터를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고대에 발견된 원시인의 뼈를 놓고 연령 추정을 해서

요즘 기준으로 어른과 아이를 구분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 있는데... 요즘 기준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요즘의 수명을 기준으로 하는 것인데 그 뼈의 시대를 파악해서 그 시대의 수명을

파악한 후에 구분을 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평균 수명 30살인 시대에 15살짜리 유골을 놓고

중딩 유골이다라고 하면 이상하잖아? ^^;;;

 이런 식으로... 사마천 본인이 제 아무리 노력했더라도 이런 시대적인 차이는 반드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예전에 역사서에 등장하는 군사들의 숫자를 놓고 이견이 있던 것처럼 사마천의 생각과 기준,

수집된 자료의 원래 기준 등에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또, 사기에 대한 주석서를 단 사람의 생각과 기준에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더욱 더 그렇다.

 이는 문장의 표현과 해석, 글자의 사용, 각종 단위까지 모든 면에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문제이며,

더 중요한 점은 절대적인 기준을 마련하기 어렵다는 것! (예를 들어 좌승상 우승상의 지위는 지금 킹덤의

시대와 이후 시대와 차이가 있으며 그 또한 어떤 시기를 기준으로 잘라 나뉘는 게 아니라 이랬다 저랬다

하는 식으로 계속 변화가 있었다. 어떤 기준을 정해서 어느 시대에나 적용할 수 없다는 야그...)


 그래서 역사학자들끼리도 같은 사기를 놓고도 그 표현과 해석에 이견이 계속 있고,

또 추가적인 유물이나 자료가 나타나면 또 수정되기도 하고... 암튼 복잡한 문제다.

 사기만 해도 중요한 부분들을 놓고 역사학자들끼리 다른 부분들이 많다.


 게다가, 지금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사기라는 것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판본 중에

어떤 판본인가를 선정해 번역한 것이고 번역자마다 또 다르기에... 몇개의 필터를 더 덧붙이게 되는 만큼,

읽을 때 꽤 주의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역사서를 볼 때에는 단순한 텍스트 외에도 고려해야할 점이 참 많다.

 어쨌거나 중요한 점은 사마천은 유교가 지배하기 이전의 한나라의 사람이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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