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책을 보는데 문득!

[킹덤 열전] - 법가로 열국을 통일한 진나라의 일등 공신, 이사

베리알 2011. 2. 8. 21:12

 이번 킹덤 열전의 주인공은 진나라 통일의 일등 공신이랄 수 있는 이사가 되겠다.

...라고는 했는데, 실제로는 이사에 대한 얘기라기보단 법가에 대한 얘기가 되겠다.

 이사 본인에 대해선 현재까지 킹덤에서 열전을 얘기할 만한 활약도 없을 뿐더러,

킹덤이라는 작품의 성격상 앞으로도 크게 활약하는 모습은 보기 힘들 것 같은 바,

이사 얘기를 꺼내면서 그동안 진나라의 통일 과정에 있어서 지대한 역할을 했던

법가라는 것에 대해 살짝 언급해 보고자 한다.





[ 작품 이미지의 저작권은 대원과 集英社에 있습니다 ]

킹덤에서 여씨 사주의 일인으로 나오며, 법을 수호한다는 이사.


문관과 무관의 대립은 언제 어느 시대나 끊이지 않는 법이다. ^^;;;





킹덤에서 설정된 여불위의 성격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이사라는 인물의 성격 또한 보여주는 장면이다.

거대한 권력이라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듯한 동심의 소유자로 그려지는 여불위와,

모든 것에 대해 법과 원칙이라는 필터를 통해 받아 들이기에 동심이나 유희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이사...



심지어 여불위의 간통 소문을 듣고도, 긴장한 기색도 없이 바로 그게 사실이냐고

여불위에게 물어볼 정도로 융통성도 없고 그저 원리원칙만을 위해 사는 것 같은 캐릭터로 그려진다.


 武에 많이 집중된 킹덤의 특성상, 그리고 소년지 만화에서 그리기 어려운 형태의 캐릭터이기에

여태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별반 활약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사... 그러나, 실제로는 킹덤에 나온

그 어떤 캐릭터보다 역사에서 비중이 있는 인물이다.


 과연 이사라는 인물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리고 진나라 통일의 원동력이 된 법가란?





[ 피도 눈물도 없는 법가, 그리고 그 실천자인 이사 ]

-이사 본인에 대해선 사기 열전 등으로 많이 알려져 있을 것이다.

하급 관리로 일하던 중에, 변소에 있던 쥐는 사람들을 무서워하는데 곳간에 있던 쥐는 사람들을

신경도 안 쓰는 것을 보고 사람을 결정하는 것은 환경이라는 깨달음을 얻어 출세하기 위해

공부를 하려고 길을 나섰다는 일화는 사기 관련 책이 아니더라도 유명한 일화다.


-초나라 사람으로 순자에게서 한비자와 같이 공부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한비자는 법가의 유명한 인물로, 법가라는 학문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사조차 비교할 수 없는,

법가라는 개념을 새롭게 확립한 주인공으로, 유교에 공자가 있다면 법가에는 한비자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위치의 인물이다.


-흔히들 그냥 법가라고 말하지만, 법가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고 각기 내용면에서 차이가 있었는데,

이런 것들을 하나로 융합해 전국시대의 법가를 확립한 것이 바로 한비자였다.

 그리고 이 한비자의 법가 이론은 진시황의 열렬한 사랑을 받는데...

왜냐하면 그 내용이 독재자 킹왕짱만이 진리인양 옹호하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원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독재자들에 의해 독재 옹호에 이용당했다고 하지만,

한비자는 그 자신이 천상천하유아독"재"를 부르짖었다고 할만큼, 지금 기준에서 보면

이런 미친 병맛 이론이 있나!...싶을 만큼 황당할 정도로 군주독재를 주장했다.


-한비자의 독재 찬양이 어느 정도였나 하면... 한비자는 군주의 능력이나 업적과 관계없이,

군주라는 위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조건 절대적인 충성을 받아야 한다고 봤다.

 군주가 병신이든 바보든 폭군이든 뭐든 간에 군주니까 킹왕짱!...이라는 것이다.

 굳이 지금 기준으로 보지 않아도 얼마나 불합리한 이론가였나를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법에 의해 모든 것을 처리하는 법치라는 기본 이론조차 한비자에게선 버려졌는데,

한비자가 주장하는 법가는 법에 의해 모든 것이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군주에 의해 모든 것이 처리되고 법이란 그저 군주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으니 말 다했다.

 다른 법가 인물들은 생각이나 방식은 서로 달라도 그래도 법 근본이라는 목표를 추구하긴 했는데,

법가의 가장 유명한 인물인 한비자는 그것과 전혀 달랐던 것이다.

 예를 들어, 태자가 법을 어기자 그 스승들을 처벌했던 상앙의 행위를 한비자는 비판했다.

장래 군주인 태자가 그까짓 법을 어겼다고 어찌 감히 처벌하냐는 것이었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다는 유교와 비교해서 뚜렷하게 차별화된 법가의 법치를,

법가의 가장 유명한 인물이 부정한 것이다(믿어지지 않는 분들이 많겠지만, 사실이다).

 황당해 보이지만 사실이며, 그 때문에 법가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면서도 그 이론을

현대에 적용하기는 가장 무리가 있는 인물이 한비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독재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환영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괜히 독재자들이 한비를 찬양하고 한비 책들을 읽는 게 아니다.


-이사는 여불위의 식객이 되었다가 여불위의 추천으로 왕궁에서 일하게 되면서

드디어 진왕 영정을 만나 열국 통일을 위한 목표를 위해 달리게 된다.


-한비자의 독재 찬양에 관심을 보인 진왕 영정에 의해 한비자가 진나라에 오자,

자기 자리가 위험해질까 봐 한비를 모함해 옥에 가두고는, 바로 자결하게 만들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라 이때 한비를 죽은 사람을 이사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고,

또는 이때 진나라에서 활약하던 외국 출신의 다른 유력 인사들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사가 죽였다는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많고, 내가 보기에도 이사가 죽였다는 게 가장 그럴싸하다.


-진나라의 열국 통일에 있어서 앞에서 뛰는 장수들처럼 화려한 전공은 없어도,

그 내용에 있어서 그 어떤 장수도 상대가 안 될만큼 공적을 쌓은 이사인지라,

결국 나중에는 승상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알려져 있다시피, 진시황의 후계자 문제를 놓고 간신 조고의 음모에 동참하는 바람에,

진나라도 말아먹고 이사 본인도 그 삼족과 식객들이 다 죽임을 당한 것은 물론,

그 자신이 처참하게 허리가 잘려 죽게 된다.


-이사는 왜 조고의 음모에 동참했을까?

  좋은 말로 포장하면 개국 초기의 진나라를 법가로 안정시키기 위해서라고도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결국 이사 본인이 기득권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사는 법가로 한평생을 달려 왔고 그 법가로 진나라를 통일까지 이르게 했는데,

진시황이 마지막에서야 지목한 후계자인 장남 부소는 진시황에게 미움을 받을만큼

법가가 아닌 유교적인 인물이었기에 부소가 등극하면 법가의 이사는 팽당하거나

최소한 권력에서는 물러나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

 그 권력 놓치기 싫다고 환관과 손을 잡기까지 했는데, 결국은 그 때문에 그 본인은 물론,

일가가 모조리 죽게 되고 나아가선 진나라까지 망하게 되었으니 이사의 해악이 크다고 하겠다.

 만약에 여기서 이사가 현명한 선택을 했다면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으로 생각하며,

이사 본인도 역사의 유명한 공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을 것이다라고 본다.


-왜 진시황은 부소를 미워하고 호해를 이뻐했을까? 1

 표면적으로는 부소가 유교적인 인물인데다가, 진시황의 폭정에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속내용은?

 첫번째로, 역사에서 왕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왕자들이라는 점이다.

그중에서 최강의 왕위계승권을 갖는 왕자, 즉 장남은 왕의 믿음직한 후계자가 아니라,

언제 자기 자리를 노릴지 모르는 최고의 역적 후보가 되는 것이다.

두번째로, 부소의 출생이다. 진나라는 바로 바로 후계자를 임명하는 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의 아버지 자초가 영정을 바로 태자로 임명했던 것이나,

자초의 아버지 안국군이 자초를 바로 태자로 임명했던 것이나, 그게 다 진나라의 법률에 의한 것이었다)

진시황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 태자 결정을 미루었는데... 이에 대해서 부소의 모친이

초나라 왕녀였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진시황은 역사에 외척열전이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그 시절 부인 관계는 베일에 싸여져 있지만,

다른 정황들이나 특히 진나라에 반기를 든 진승 오광 등이 스스로 부소와 항연이라고 칭했다는

점을 보면, 거의 확실하지 않을까 싶다.

 항연이야 초나라의 마지막 명장이었다지만, 진나라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 그 진나라의 태자를

자칭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상하다. 즉, 다시 말해서 진나라의 태자를 사칭하는 게 초나라인들의

지지를 얻을 구실이 되었다는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부소가 초나라의 후손,

즉 부소의 모친이 초나라 왕녀였다고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예전에도 언급한 것처럼 진나라에서는 외척들이 큰 힘을 발휘했으며, 진시황 이전 시대에는

거의 초나라계 외척이 계속 힘을 쥐고 있었던만큼, 그런 외척들의 시달림(승상까지 지낸 창평군도

초나라 외척이었고, 창문군도 초나라 외척이거나 최소한 그쪽의 세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을 기억하는

진시황으로선 초나라계 외척의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부소의 태자 임명은 꺼렸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로장생을 꿈꾸며 오래 오래 황제를 하고 싶던 진시황이

후계자 선정이라는 그 자체를 좋아했을 리 없었겠다.

 

-왜 진시황은 부소를 미워하고 호해를 이뻐했을까? 2

 부소는 그래서 미워한다고 치고, 그럼 호해는 왜 전국 순방길에 데려갈 만큼 이뻐했을까?

 이는 굳이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너무 당연하고 역사에서 흔한 경우라 하겠다.

 요점은 호해가 막내아들이라는 점이다.

 장남이 아버지를 위협할만큼 큰 상황에서도 막내는 아직 충분히 어리광을 부릴 나이일 수 있으니,

왕위를 노리는 게 아닌가 싶을 시커먼 장남보다야 재롱 부리는 막내가 이뻐보이는 건 당연하다.

 더 중요한 건, 그 어머니다.

 장남의 모친은 대부분 정비, 즉 첫번째 부인이다. 막내의 모친은 대부분 최근에 얻은 첩이다.

 첫번째 부인은 아무리 젊어 봐야 이미 여성의 전성기를 훨씬 지난 상황이고,

최근에 얻은 첩이야 뭐 아직 젊고 아름다운 시절이다.

 게다가, 정비는 좋든 싫든 정치세력화하여 그 중심에 있다.

최근에 얻은 첩은 아직은 그렇지 않다.

  때문에, 역사에서는 정비의 몸에서 난 장성한 태자가 멀쩡히 존재하는 데도 불구하고,

뒤늦게 태어나 앞가림도 못 하는 어린 막내 아들을 무리하게 태자로 세우려는 일이 자주 있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말이다.

 

-이사는 진나라에서 득세하는 외국인들을 경계한 기득권 세력의 반발로,

외국인들이 추방당하는 사건인 축객령 때 그 부당함을 지적하는 글을 영정에게 올려서

축객령을 취소시켰던 일은 물론, 그후에도 사건 때마다 그럴싸한 문장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이사는 문자통일에도 기여해 소전체를 만들었다고 할 정도로

文의 재능도 있었다고 한다.


-이사는 꽤 늦게 승상에 올랐는데, 이는 다 이유가 있다.

이사는 정위라는 직책을 맡았었는데 이는 진나라의 법을 좌지우지하는 직책으로

법가를 추구하는 진시황에 의해 이 직책은 중요해지고 그 권한은 대단히 강력해졌던데다가,

독재를 꿈꾸는 진시황에 의해 승상의 권력은 제한되었기에 결과적으로 진시황 시절에는

승상이 아니라 정위야말로 진짜 권력을 휘두르던 직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도 이 시기 승상들의 활약은 거의 볼 수 없는데 반해, 정위인 이사의 활약은 화려하다.

 진나라의 열국 통일 후 법가의 시스템을 확립하는 것이 하루 이틀 걸리는 작업이 아니었으니,

가장 중요한 진나라의 정위 위치에서 이사가 쉽사리 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진나라에 대해서, 그리고 법가에 대해서 폄훼하는 시각이 있는데

(단명한 걸 봐도 그렇고 한비자의 막장 군주킹왕짱이 실현된만큼 나라가 막장으로 안 가는 게 이상하긴

하겠지만...) 실제로 문제점과 단점들도 많긴 하지만, 일반적인 선입견 이상으로 장점도 있었다.

 단적인 예로, 보통 유방이 진나라에 반기를 들어 한나라를 세웠다는 게 상식이지만,

실제로 유방의 한나라는 진나라와 노골적인 단절을 주장하지 않았으며,

진나라의 시스템이나 방식의 상당 부분을 그냥 이어서 사용했다.

 진나라가 그리고 법가가 역사에서 부정당하게 되는 것은 나중에 한나라에서 유교독재가

이뤄지면서부터의 일이다.


-법가 일당독재의 여러 역사적인 사건들(분서갱유 같은)이 화려해서 드러나진 않지만,

유교 역시 일당독재의 시대로 접어들면서는 그런 화려한 건수가 없다뿐이지 내용에 있어선

큰 차이가 없었다. 진나라에서 법가 이외의 사상에 대해 금지하고 법가에 대해 왈가왈부 논하는 것을

금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나라에서는 유교 독재 성립 이후부터는 유교 이외의 사상에 대해 금지했고

유교의 가르침이나 경전에 대해 왈가왈부 논하는 것 자체가 역시 금지되었다.

 오랜 유교 독재로(거의 일상화되었을 정도니...) 그 만행들이 알려져 있지 않아서 그렇지,

유교에 대해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하고 하는 일은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이 시절의 법가와 그 법치에 대해 무조건 좋다고 보는 것도 위험하다.

시대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요즘 시대에 적용하려면 상당한 필터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독재자들이 괜히 법가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요즘의 시각으로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막장 정책인 우민 정책도,

그 시절 법가에서는 당연한 기본이었을 뿐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가져올 수 있는 건 가져와서 활용해야 하는 것도 분명하다.

 힘 없고 돈 없는 소시민이나 힘 있고 돈 많은 권력가나 재벌 등에게 같은 법을 적용해야 하는 것,

그거 하나만 실현해도 현실은 정말 나아질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법이 아닌 인정 많은 법을 바라는 건 유교의 악습이자,

대표적인 기득권의 우민 정책의 실현이라고 보는데... 법에 있어서는 피도 눈물도 없이 냉정한게 옳다.

법에 인정을 부여하면 법을 어긴 정말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하여 사회에 도움이 될까? 천만에!

 인정이 있는 법이라는 건 곧 부정과 불평등의 다른 말이다.

 누구 애비라고 봐주고 누구 딸이라고 봐주고 누구의 사돈의 팔촌이라 봐주고

누구는 높으신 양반이라 봐주고 등등... 법에 인정을 부여하는 순간 이런 부패와 부정이 용인되는 것이다.

 법치에서 가져온다면, 독재자들이 좋아하는 그런 개같은 부분들이 아니라,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이 적용하는 법치를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재벌들 수사 얘기 나오면 사법처리에 고심한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런 게 바로 개소리인 것이다.

 재벌의 새끼든 소시민의 자식이든 죄를 지었으면 같은 기준에서 사법처리를 하면 된다.

 재벌의 새끼는 사법처리로 서비스 안 해도 이미 특혜를 받고 있으니까.

 국선 변호사도 선임할 수 있을까 말까한 소시민의 자식에 비해서,

전관예우(이것도 빨리 사라져야 한다)나 비싼 변호사를 얼마든지 쓸 수 있는 재벌의 새끼는

그 자체가 이미 특혜를 받는 것이다. 거기다가 법이 또 보너스를 줄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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