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책을 보는데 문득!

[킹덤 열전] - 책을 불태우고 유학자를 생매쟁한 진시황의 악행, 분서갱유

베리알 2011. 1. 2. 12:00

 몇명 인물은 생각해 두었지만, 아직 다음 킹덤 열전의 인물을 콕 집어 정하지 못 했고,

지난번 여불위 편에서 유학자들에 대해 살짝 언급한 바가 있기 때문에,

이번 킹덤 열전은 좀 쉬어가는 의미이자 특별편으로 진시황과 관련된 사건 하나를 끄집어 보았다.

 (이 인물이고 저 인물이고 막 킹덤 열전을 전개했으면 좋겠지만,

킹덤의 진행 속도도 느려서 새롭게 나오는 인물들이 많지 않은데다가,

이 시대에 관한 정보는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막상 킹덤 열전을 하려고 해도

적당한 꺼리가 없는 경우가 많은 게 에로사항이다. ^^;;;)


 분서 갱유.

 진시황의 대표적인 악행 중 하나로 손꼽히는 사건이며,

진시황 개인에 대한 비난을 넘어서 역사에 있어서도 대표적인 폭군의 만행 중 하나로 언급되는

큰 사건이다.

 아마 킹덤에서 이 분서갱유 혹은 그 이상의 시기까지 다룰 것 같지는 않으니

(이신의 대장군 등극이나 영정의 열국 통일 때까지... 정도를 다루지 않을까?)

이쯤에서 다뤄 보겠다.


 흔히들 분서 갱유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두가지 사건을 붙여 놓은 말로,

분서 - 통일 후, 예전 열국 시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자

그에 대한 대책으로 농사 등 생활에 필수적인 책을 제외한 다른 무수한 책들을

모조리 압수해서 불질러 버린 사건

갱유 - 분서로도 만족하지 못 했는지, 진시황과 통일 진나라를 비방하는 유학자들을 잡아 들여

산 채로 생매장한 사건

...이 두가지 사건(사실 별개의 사건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을 합쳐서 그냥 부르는 말이

분서 갱유인 것이다.





[ 작품 이미지의 저작권은 대원과 集英社에 있습니다 ]

책을 붙태웠다고 하지만, 실제로 불태운 것은 영정이 들고 있는 것 같은 죽간이다.

죽간은 문자 그대로 책의 내용을 대나무를 엮어 만든 것에 기록한 것으로

지금은 종이에 책 내용을 적지만, 그 종이가 발명되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한나라의 채륜 시대 이전

(사실은 한참 더 후까지의 얘기다. 종이가 비단보다는 쌌다고는 해도 역시나 비싼 물건이었던지라

일반적인 수준으로 사용되기에는 더 시간이 걸렸다고 본다)에는 죽간, 목간 등의 매체를

사용했다.



창평군이 들고 있는 죽간이 두께나 부피는 갑옷이나 방패, 흉기 수준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죽간은 적을 수 있는 내용에 비해서 어마어마한 부피와 무게를 자랑했다.

보존성도 대단히 나쁘다.

물론, 어디까지나 종이에 비해서...이다. 역으로, 종이가 그만큼 뛰어난 매체랄 수 있다.

(인류 최대의 발명품이라는 평도 괜한 게 아니다. ^^)


 몽의는 지금도 범상치 않은 꼬맹이지만, 나중에는 더욱 활약하게 된다.



심지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은밀하게 잠입한 자객조차 명단을 저런 죽간에 적어서

가지고 있는데...


 이 당시에 죽간 이외의 기록 매체로는 비단 등이 있었지만, 일반적인 서적을 기록할 매체로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을만큼 비싸고 귀했다. 진나라의 왕이라고 해도 자신이 볼 책을 비단에 옮겨서

즐길 그런 성격의 매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비단 찢는 소리를 들으면 미소를 짓는 미녀에 빠져서, 비단을 무작정 사들여 찢어대던 왕 때문에

어떤 고대의 나라는 파산에 이르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런 식으로 흉기로 사용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매체! 그것이 죽간이다. ^^;;;



[ 이미지의 저작권은 해당 영화사에 있습니다 ]

영화 영웅의 한 장면. 죽간은 이런 식으로 말아서 보관을 했다.

영웅은 중국의 막장 중화 정책 덕분에 같이 욕을 먹었고,

실제로 욕을 먹기 딱 좋은 내용을 볼 수 있긴 했지만,

진시황에 대해 관심이 있던 나로선 흥미롭게 봤던 영화다.



척 봐도 엄청난 부피와 무게로 추정되는데,

문제는 이런 엄청난 부피와 무게에도 불구하고 정작 적을 수 있는 내용은 그에 비해서

아주 적었다는 것... 다시 말하지만, 종이가 너무 뛰어나다. ^^;;;



이 정도 규모의 죽간이라고 해도, 요즘 일반 개인의 집에 구비된 서적의 정보량보다 적었다고 할 수 있겠다.

예전 오거서라고 해서 수레 다섯 대에 책을 싣고 과거를 보러 갔다는 얘기도 있는데,

지금에서라면 가방 하나로도 휴대가 가능할 뿐더러, 멀티미디어 기능을 활용한다면

주머니에 넣고 다녀도 무방할 수준이겠다.



책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냥 덧붙이자면, 진시황의 업무 처리량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했다고 한다.

매일 일정한 량(죽간이니만큼 무게로 따졌던 듯... ^^)의 업무를 처리하지 않으면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고

하는데, 통일 중국의 황제로서 향락을 즐길 시간이 얼마나 있었을까 싶다.



자, 암튼 그럼 정말로 진시황은 귀중한 문화 유산인 죽간을 다 불태우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유학자들을 생매장한 잔인무도한 대악행을 저질렀을까?







[ 완전히 없던 일은 아니지만 너무 심한 누명을 쓴 진시황 ]

-일단 분서부터 얘기해 보겠다.

분서의 경우 어느 정도 사실인 것은 맞다. 실제로 진시황이 죽간을 몰수해 불태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좀 들여다 봐야 한다.


-진시황 본인이 심한 법가 신봉자는 아니었지만(진시황은 진나라의 통일, 그리고 통일 진나라를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방책들을 찾았고 그 방법이 법가였던 것이지 그 본인이 법가 덕후는 아니었다),

법가로 새로운 통일된 나라를 운영하기 위해 기존의 질서를 파괴할 필요가 있었다.

 새 진나라를 운영해야 하는데, 기존 열국들의 백성들이 각자의 패러다임에 그대로 안주한다면 문제니까.

 이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 중에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 받는 것이 도량형이나 문자의 통일 등이겠고,

부정적으로 평가 받는 것이 이 분서겠다.


-특히 열국을 통일하긴 했지만, 통일했다고 바로 새 시대가 열리고 구 세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진시황(과 그 신하들)은 전국시대의 혼란을 초래한 이유가 제후들을 임명하는 봉건제라 보고,

이 구 시스템을 파괴하고 중앙 집권제를 확립하기 위한 신 시스템으로 군현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이 반발은 긍정적이라 볼 수 없는 게... 이 반발이 새로운 시대를 위한

반발이나 백성을 위한 반발이 아니라 기득권층의 기득권 옹호를 위한 반발이었기 때문이다.

 구시대의 기득권, 그러니까 왕족이나 유력 귀족 등은 통일 진나라에서 제후로 임명되어

자기 영지를 받아 왕처럼 살 기대에 부풀어 있었는데, 군현제의 실시는 이런 기대를 원천적으로

와그리 무너뜨리는 것이고, 이들 기득권이 무슨 선정을 베풀겠다고 제후가 되고자 하던 것도 아니었다.

중앙집권이 제대로 확립이 되는 것보다, 지방 제후로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게

부정축재가 훨씬 쉽고 향락 사치를 누리기도 쉽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런 구 시대의 폐단인 봉건제를 옹호하며

덤으로 계속 구 시대의 패러다임을 들고 오는 기득권 세력들과,

 통일 진나라에 대한 반감을 가진 구 열국들의 신시대 거부 분위기를 막기 위해선

사상적으로 통일 진나라의 것을 주입하고 상대적으로 구 시대의 것들을 말살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실천된 것이 분서다. (분서를 옹호하는 게 아니다!!!)


-분서가 그럼 구 사상과 역사의 말살을 가져 왔을까? 이것에 대한 조사가 진행될수록

대답은 아니오...쪽으로 기울어졌으며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아니오...쪽에 가깝다.


-알려진 것처럼 분서는 이미 실생활에 필요한 필수적인 책들은 남겨 놓기로 했던 데다가,

그외의 태우는 책들도 모두 태우는 게 아니라 진나라 왕궁에 보존판을 남기고 태우기로 했다고 한다.

즉, 일반적인 의미의 문화 말살이라고 보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당시 개인이 가진 죽간을 모두 태우는 게 가능했을까?

아마 진나라의 모든 행정력과 군사력을 동원해도 절대로 불가능했을 일이다.

즉, 이 분서 조치는 정말로 모든 것을 말살하려는 결과를 노렸다기보다,

통일 진나라의 확립을 위해 구 시대의 잔재를 지우려는 상징적인 시도였을 가능성이 크다.

통일 진나라가 세워졌으니 이제 여기에 따르라는 그런 광고였다랄까.


-예를 들어 유교의 경전... 유교의 경전이 언제 싸그리 사라져서 새롭게 씌어지거나,

혹은 그 때문에 전래에 있어서 발생한 오류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었나? 대답은 아니다.

 유교의 경전들은 잘만 존재했고 잘만 전해져 왔다. 즉, 분서 당시에 감출 만한 사람들은

잘 감추었고 그것들이 또 잘 전해져 왔다는 얘기다.

 물론, 진나라의 통치(말살) 기간이 짧았기에 별다른 이상 없이 전해졌을 수도 있지만...


-그럼 분서가 없었다면 그때 태워졌을 수많은 고전들은 가치 있게 살아 있을까?

대답은 역시 아니오...에 가깝다. 죽간은 보존이 무척이나 어려운 매체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죽간은 많지 않을뿐더러, 그중에서도 죽간의 내용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온 경우는 또 드물다.

즉, 분서가 없었더라도 죽간들은 많이 유실되었을 운명이며, 이런 경우는 계속 옮겨 적으며

전해져 왔을 것이다.

 분서로 인한 피해가 없었다는 얘길 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역사학자에 따라선,

분서로 인해 파괴되었을 죽간의 양은 분서가 없었어도 자연적으로 파손되었을 양에 비해서

크게 차이가 없다고 보기도 한다. 분서로 인해 사라진 내용도 있긴 했겠지만, 정말 중요한 내용들이라면

전해졌을 거라는 측면의 얘기다. 물론, 분서 없이 전해졌으면 더 좋았겠지만...

(특히, 진나라 이외의 열국들에 대한 기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유를 이 분서에서 찾기도 한다)


-분서의 진정한 주인공은 사실 따로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전국시대나 진나라에 대한 역사 얘길 몰라도, 초한지 이야기는 들어봤을 것이다.

그리고, 그 초한지에 이런 내용이 있다는 것도 알 것이다.

유방을 제치고 진나라에 돌입한 항우가 아방궁에 불을 질러 3개월이나 타올랐단 얘기를 말이다.

그리고 아까 위에서 분서에선 보존본을 남겼다고 얘기했다.

즉, 그 보존본을 말살한 주인공은 진시황이 아니라 항우인 것이다.

 단, 이 경우는 좀 복잡하다. 아방궁은 사실 완성되지 못 한 미완성품이라는 의견이 갈수록

힘을 얻는데 이 아방궁의 유적에선 불에 탄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하다. 즉, 항우는

아방궁을 불사른 적이 없었다는 것. 하지만 이는 아방궁에 집중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있다.

다시 말해, 항우는 진나라의 어떤 왕궁을 불살랐고 여기서 보존본들이 다 탔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상식적으로 미완성의 궁에서 직접적인 행정 업무가 이뤄지진 않았을테니

보존본이 아방궁이 아니라 다른 왕궁에 존재했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일 것이다.


-그리고 갱유. 분서는 그래도 존재했었던 사실이라고 인정 받지만,

갱유의 경우 역사학자들의 조사가 진행될수록 존재 자체를 의심 받는 사건이다.


-갱유의 경우, 알려진 것처럼 반발하는 유학자들을 생매장 한 게 아니라,

미신에 빠진 진시황을 우롱하고 사기를 친 방사들을 처벌한 사건이었으며,

사서가 전해지면서 와전된 것을 유학자들이 방치했거나,

혹은 유학자들 스스로가 수정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의견이 있다.


-실제로 사기에서 이 갱유 사건과 관련해서, 발단은 방술사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몇문장 지나가지 않으면 점차 그 대상에 유생이 추가되고 이후 아예 유생으로 교체된다.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아무래도 훗날 누군가의(유학자들일수도 있고...)

수정이 가해졌거나 그렇게 잘못 와전된 기록이 인용되어 이후 정설로 인정받았을 거라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진시황이 유학자들을 묻어버렸다는 얘기는 이후 중국은 물론 아시아를 장악했던

유교의 입장에서 보기에 나쁘기는커녕 아주 좋은 얘기이니만큼, 이후 역사를 장악한 유학자들이

이런 문제를 바로 잡을 노력을 했을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더 덧붙이면 덧붙였지...


-고우영의 십팔사략을 예로 들면 이런 비논리적인 결합을 인용했다는 게 바로 눈에 띈다.

진시황에게 사기를 친 방술사가 도망치면서 진시황에 대한 비방글을 남기는데,

이를 보고 열 받아하며 난리를 치던 진시황이 갑자기 글의 논조를 보니 유생들이 한패라는 얘기를

하며 유생들을 잡아 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본래의 목적도 연결도 다 엉망인 것이다.

(고우영의 십팔사략이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고우영의 십팔사략은 각종 역사서를 고우영이

인용해 엮은 역사서라 할 수 있는데, 그 때문에 인용된 역사서의 내용 자체가 문제가 있을 경우

당연히 그 문제는 그대로 고우영의 십팔사략에 나타나게 된다)


-갱유에 대해 실존하지 않았을 거라 보는 의견 중에는 진나라가 법치국가인 것을 이유로 드는

의견도 있다. 진나라에서 진시황이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횡포를 부렸을 거라는 상식과 달리,

원래 진나라는 열국 중 가장 먼저 법치 국가를 이뤘고 그걸 바탕으로 통일을 한 만큼,

황제의 화풀이로 사람들을 대량 생매장시켰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생매장은 백기의 장평 사건 등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그건 군대의 특수한 예이고

진나라는 이미 이전부터 생매장을 금기시 했으며 특히 진나라의 법률에 관한 자료 중에서

생매장에 관련된 형벌은 없다고 알려져 있다)


-이상과 같은 이야기에서... 분서와 갱유는 훗날 누군가에 의해,

혹은 유학자들에 의해 날조되고 확대되고 방임되어 전해지게 된 기록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이외에도 흔히 상식이라 말할큼 일반적으로 알려진 진나라의 그리고 진시황의 악행이나 업적 중에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거나 혹은 과장 또는 날조에 가까운 뻥튀기나 소설이었다는 의견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역사란 그래서 참 재미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