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책을 보는데 문득!

소년지 바쿠만이 보여주지 못한 소년점프의 역사 - 만화제국의 몰락

베리알 2013. 12. 17. 19:04



  어쩌다 보니 우연히 뒤늦게서야(국내 출간일은 2007년)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되어,

충격적인 제목에 놀라고, 책 내용을 보면서 두번 놀랐었다.

 

 데스노트 콤비(맞나?)의 바쿠만이란 작품을 보면, 만화가 캐릭터가 나와도 적당적당한

경우가 많던 그동안의 만화들과 다르게, 상당히 깊숙한 부분에서 만화가의 세계를 다루어

색다른 재미를 주었었는데... 그 만화가의 세계란 게 다른 만화가들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소년점프의 세계여서 더욱 흥미진진했었다.

 그러나, 역시나 우정, 승리, 노력의 삼위일체신이 지배하는 유일신 세계관인 소년점프인지라,

직접적으로 그쪽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역시나 점프스러운 전개는 어쩔 수가 없었는데...

 이 책은 그렇게 소년지 만화로 바뀐 소년점프의 세계가 아니라, 소년점프 前편집장 그것도

소년점프의 황금기를 쌓아 올렸던 편집장 니시무라 시게오의 시각으로 회고하는 소년점프의

세계인지라... 통하고 겹치는 부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전혀 다른 부분들도 등장한다.

 그리고, 그게 참 재미를 준다.





( 이미지 출처 : www.yes24.com )

-일단, 솔직히 저질스럽다는 생각까지 드는 제목부터 까고 들어가야겠다.

 이 책의 원제목은 저런 한국식 제목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제목인데... 이게 옮긴이의 의도인지

업체의 의도인지 우연인지, 암튼 참 엽기적이고 말도 안 되는 제목을 한국에선 붙여 놓았다.

 특히나, 이게 우연이 아니라 누군가의 어떤 의도가 확실한 게... 단지 제목만 저렇게 붙인 게 아니라,

아래 띠지에서 보이듯 몰락이란 단어를 계속 사용하고 있고, 또 ㅈ일보기자의 서문에서 보듯이,

적어도 이 책의 한국판에 관계된 사람들은 한결같이 몰락 몰락 몰락의 정서를 꼭 강조하고 싶은가 보다.

 누가 보면, 前소년점프 편집장이 소년점프가 망하고 나서  한탄하는 내용인줄 착각하게 말이다. -.-;;;


-현실은 전혀 다르다. 일단, 예전과 같은 황금기는 아니라 하더라도 소년점프가 몰락했다고 말할

상황도 아니라 저 제목은 일단 에러 수준이고... 니시무라 시게오가 소년점프에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닐텐데,

아니 설사 소년점프 자체에는 원한이나 뭐 부정적인 감정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소년점프의 역사를 일궈 온 사람이 그 추억을 회고하며 몰락블라블라 거릴 리가 없지 않은가.

 왜 저런 자극적인... 솔직히 말해서, 더럽게 보이는 한글 제목을 억지로 가져다 붙였는지 모르겠다.

 원 제목이 소년점프의 황혼만 되었어도 이런 소린 안 하겠는데, 정말 제목 자체가 더럽게 느껴진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내 청춘의 소년점프(わが青春の少年ジャンプ)다.

 (내 추측인데, 아마 저자는 마츠모토 레이지의 하록선장 극장판인 내 청춘의 아르카디아라는

제목을 이용한 것 같다. 뭐, 원래 저쪽 동네가 내 청춘의 xx가 예전부터 유행인지라, 그 근원이 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짜증나다 못해 더럽게까지 느껴지는 제목의 압박은 뭐 무시하고 넘어가 주고...

 이 책은 친분이 있던 (그러나 이미 사실상 잊혀진지 오래인) 작가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니시무라 시게오가 장례식에서 돌아오며 과거를 회상해 보는 식으로 써보겠다며 시작되는 글로,

니시무라 시게오의 시각에서 펼쳐지는 일종의 소년점프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바쿠만이 일반 만화로선 꽤 깊숙하게 소년점프의 세계를 다루긴 했지만,

아무래도 소년지 그것도 소년점프라는 개성적인 필터를 거친 내용인지라, 여러모로 한정된

이야기만을 보여줄 수 없던 것과 달리... 소년점프의 전 알바생도 아니고 무려, 소년점프의 황금기를

쌓아 올리던 시절의 편집장이 털어 놓는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흥미진진하다.


-소년점프라는 잡지가 탄생해 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니시무라 시게오의 시각에서 이제는 아니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작가들이 가명이 아닌, 실제 이름으로 애송이로 등장하는 이야기나 그들의 잔행

과정이 나오는 것은 그 자체로 일본 만화팬들에게는 흥미를 펑펑 유발시킬 듯 하고...

 (부정적인 면도 많지만) 확고한 개성의 소년점프 시스템의 성립과 그 진행 과정의 이야기,

그로 인한 명와 암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펼쳐지는 것도 역시나 흥미 펑펑이다.


-더불어서... 업계 관계자의 회고가 아니면 접할 수 없는 소년점프 발전 과정 속에서의 노조 이야기나

소년점프의 모토와 달리, 역시나 어른들의 권력 투쟁 그리고 어른들의 사정이 얽히고 섥힌 소년점프

내부의 이야기들은 역시나 소년지 그것도 소년점프의 만화에서는 나오지 않을 내용이구나...싶다.

 특히, 소년점프라는 만화 잡지와 그 만화들이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어른들의 사정이 여기저기서

흘러 나오는 건 쉽게 접할 수 없는 것들이니까. 원가율 이야기를 만화에서 제대로 다루기는... ^^;;;


-제목이 처절할 정도로 마음에 안 든다는 점을 제외하면, 번역 자체는 나쁘지 않은 듯 싶다.

특히, 워낙에 그쪽의 하드한 이야기인지라 일본 만화를 좀 봤다는 정도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여러 용어나

인물들이 줄줄 나오는데, 거기에 맞춰서 그때 그때 주석을 달아 놓은 것은 꽤 인정!


-이 책을 보면서 다시금 소년점프의 시스템에 대해 그리고 소년점프에서 나오는 작품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확 흥미를 끌고 어느 정도까지는 재미를 보장할지 몰라도... 어느 시점이 되면

그저 연재를 하기 위한 연재가 될 수 밖에 없는, 그리고 그 방법은 인플레이션 배틀물밖에 없는 이유가

짜릿할 정도로 체감이 온다. 지금 전설로 남아 있는 여러 레전드 작품들이 있지만, 그걸 걸작으로

부르기가 살짝 조심스러워지는 중후반부의 배틀물 질질거리기들은 소년점프이기에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게... 뭐, 소년점프이기에 그런 작품들이 나오고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 역시나 소년점프이기에 그런 마무리 아닌 마무리로 질질거릴 수 밖에 없었다는 게 참...


-단, 이 내용들이 어디까지나 니시무라 시게오 본인이 쓴 내용이란 점, 즉 니시무라 시게오라는 필터를

거친 내용이란 점은 잊지 말아야할 것 같다.

 실제로 내가 이 니시무라 시게오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어쩌면 실제의 니시무라 시게오가

이런 사람일 가능성도 있긴 하겠지만... 이 책에 나오는 니시무라 시게오는 전형적인 좋은 주인공이다.

 예를 들어, 조직에 있어서 부하 직원들을 들들 볶고 소모하는 상사라던가, 정직원으로서 임시직을 보는

특권 안경 속의 시선, 회사와 노동자의 대립 등등... 만화의 내용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스펙터클한

여러 일들이 벌어지는데... 그때마다 언제나 니시무라 시게오는 좋은...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우유부단한 착한이로 한발 물러서 있다. 위인전이나 자서전 주인공들이 그런 경우가 많듯이...

 그래서, 실제로 니시무라 시게오가 그런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그의 악역까지 나눠가진

것인지 몰라서 적혀 있는 에피소드들을 액면 그대로 다 접수하기는 좀 꺼림직한 것은 사실이다.

 과연 진실은? ^^

 (그런 이유로... 권말에 있는 출판 관계자의 의견처럼, 나로서도 이 니시무라 시게오가 풀어 놓는

이야기보단, 나가노라는 사람이 풀어 놓는 이야기가 훨씬 더 흥미진진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거나, 단순한 소년지 만화 혹은 단순한 일본 만화가 아닌... 그중에서도 확고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음으로 양으로 갖춘 소년점프라는 영역... 그 영역의 속살을 추억과 함께 더 음미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이 책에 들어 있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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