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퍼 히어로들을 가장 공포에 떨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수퍼맨에게 크립토나이트 같은 태생적인 약점?
결정적인 순간에 가끔 방해가 되긴 해도, 수퍼맨이 히어로 일을 하면서 이런 거 신경 쓰진 않는다.
우주 밖에서 지구를 향해 날아오는 거대 운석?
이런 거 처리할 히어로는 DC에도 마블에도 충분히 있으니 걱정거리도 아니다.
지구 정복을 하겠다고 설치는 대마왕?
고작(?) 지구 하나 정복하겠다고 설치는 대마왕은 풋내기일 뿐이다. 우주적 존재들과도
툭탁툭탁거리고 지구도 박살나고 다시 만들고 해오던 수퍼히어로들 아닌가.
그럼, 질문을 조금 바꿔 볼까.
왜 수퍼히어로들은 복면을 쓰던가, 이중 생활을 하는 걸까.
거기에 수퍼히어로들의 공포의 답이 있다.
< 이미지 출처 :
www.yes24.com >
자신이 잡았던 악당이 자신을 원수로 생각하고 복수하려고 한다면 그냥 대비하면 된다.
무서운 빌란이 나타났다면, 동료들과 힘을 합치면 된다.
수퍼 히어로 일을 하면서 다칠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건 수퍼 히어로가 되기로 선택한 순간부터 짊어져야 할 운명의 굴레니까.
하지만, 그 어떤 수퍼 히어로도 가족들에게 그런 걸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래서도 안 되고...
그래서 수퍼 히어로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필사적이다.
자신이 수퍼 히어로 누구가 아니라, 시민 A씨라고 알려지는 순간 그의 가족, 친척, 친구, 애인...
그 모든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고통과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니 말이다.
제 아무리 안총에 절대 몸빵에 지구 어디라도 순식간에 날아갈 수 있는 수퍼맨이라고 해도
클락 켄트가 아는 모든 사람들을 동시에 보호한다는 것은 크립톤 별을 재건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빨리 달리다 못 해서 시간마저 뛰어넘는 플래시의 빠르기로도 배리 앨런이 아는 모든 사람들을
계속 달리고 또 달리며 순찰할 수는 없다.
우주의 초월적인 링 파워가 선택한 두려움을 모르는 남자 그린랜턴에게 있어서, 그에게 닥쳐오는
빌란들은 공포가 아닐지라도, 할 조단이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닥쳐올 빌란들은 어떨까.
기존에도 빌란들이 히어로들의 정체를 알아내어 이용하거나, 히어로들의 지인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경우들은 있었지만... 여태까지 그 어떤 책에서도 이 정도의 공포와 슬픔을 보여주지는 못 했다.
그동안의 이야기들이 히어로라는 추상적인 범위, 혹은 전지구적인 위기라는 거대한 스케일에서 벌어진
것과 달리... 이 책은 수퍼 히어로로서도 가면을 벗은 당사자로서도 처절할 정도로 직접적인 공포를
선사할 수 있도록, 놀랍도록 인간적인 규모로 약점을 찔러 온다.
지구에 위기가 닥쳐왔다는 상황보다, 당장 자기 손톱 밑에 가시가 박힌 상황이 훨-씬 더 아프고
실감나는 게 인간 아니겠나.
범죄 현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롱게이티드 맨... 마침내 기다리던 빌란이 나타난 순간,
일롱게이티드 맨 랄프의 연락장치에 죽음의 공포에 떠는 아내 수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모든 걸 제쳐놓고 집으로 달려간 그를 기다리던 건 처참하게 불에 타죽은 수의 시신...
신분을 노출한 몇 안 되는 히어로이긴 했어도,
JLA의 보호 아래 있었던 히어로의 가족이 살해당한 것이다.
(JLA의 히어로들이 신청만 한다면, DC세계관의 미확인 초월 기술에
무한의 돈빨로 만들어낸 최신 기술들로 무장된 강력한 보호를 가족들에게 받게 할 수 있다)
DC 세계관의 초월적인 보호 장치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히어로의 가족을 살해한
정체불명의 살인자 앞에서 히어로들은 경악하고 분노한다. 모두가 힘을 합쳐 범인을 찾는 와중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자신의 형체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겨워하던 일롱게이티드 맨은
한순간에 분노의 화신으로 돌변, 사연을 아는 오랜 친구들과 함께 예전에 악연이 있었던 빌란에게
처들어간다.
하지만, 일은 꼬이기만 하고 살인범의 정체에 대해선 진짜 단서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던 와중에, 신분을 노출하지 않은 히어로의 가족과 애인들에게 경고장이 배달되고,
이제 히어로들은 분노나 정의, 슬픔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사상 최악의 공포에 빠져 든다.
심지어 수퍼맨조차도...
마치 평범한(?) 히어로들의 임무처럼 시작되지만, 바로 이어서 히어로의 가족이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경악할 사건이 충격으로 다가오고... 이후 계속되는 범인의 경고와 습격, 수퍼 히어로의 정의란
껍질을 벗어 던지고 순수한 공포에 빠져 거칠 것 없는 자경단이 되어 버리는 히어로들의 모습,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히어로들의 과거... 히어로도 빌란도 누군가의 자식이고 부모이고,
누군가의 애인이고 사랑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보여주는 장면들은 거창한 빌란이나
정의의 히어로가 아니라 그들도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충격의 진실과 결말...
DC 코믹스지만, 마치 마블 코믹스를 보는 것 같은 내용이나
(그러고보니, 근래에 나오는 DC 코믹스들은 확실히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내 취향의 그림이 아님에도 이야기가 가슴을 찔러 오게 만드는 그림,
한편의 치명적인 미스테리 영화를 보는 듯한 몰입감의 전개 등등...
지구를 지키기 위해 초월적으로 헌신하는 수퍼 히어로가 아니라,
누군가의 가족이고 친구인 살아 있는 인간들의 이야기는 와닿는 느낌이 다르다.
안 그래도 히어로 만화의 불모지인 한국이 아니더라도 마이너 히어로이고,
그동안 개그스러운 캐릭터에 가까웠던 일롱게이티드 맨이기에...
그렇기에, 그런 그가 이런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느낌은 역설적으로 훨씬 더 처절하다.
비교적 잘 알려진 DC의 원년 히어로들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에,
굉장히 많은 히어로들이 등장하고 있음에도 다 알지 못 해도 이야기 몰입에 방해가 되진 않으며,
확실하게 살아 있는 히어로들의 개성은 이야기에 정신없이 빠져들게 만든다.
DC코믹스의 히어로들이 전형적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고작 쫄쫄이 입은 구닥다리들 나오는 만화책이라고 그래픽 노블의 수준을 파악하는 사람들에게도,
일단 권해주고싶은 걸작이다.
*** 잡설 ***
-가격도 비싸 보이고 발매되는 종류도 많지 않아서 한국의 상황이 안 좋아 보이기도 하지만,가만히 들여다보면 한국의 그래픽 노블 시장은 독자들에게 꽤 괜찮을 수도 있다.
연재되는 에피소드들을 따로 기다리며 봐야 하지 않고 적당한 규모로 묶여져 나오는데다가,
시장이 넓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 검증된, 즉 팔릴만한 수준이라고 판단된 작품들이 나오고,
비록 번역이나 제본 등에서 에러 등이 있긴 했어도 전체적으로 보면 의외로 좋은 환경...일지도?
-수퍼 히어로에 대한 이해나 지식이 적어도 적당히 넘기며 볼 수 있도록,
꽤나 자잘하게 옮긴이의 주석이 달려 있어서 상당한 참고가 된다.
-물론, 조금이라도 히어로들에 대해서 더 알면 알수록,
이야기를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는 점은 수퍼 히어로 그래픽 노블의 필수이자 상식이다. ^^
-커다란 이야기를 확실하게 전개하고 있음에도, 무서울 정도로 각각의 히어로들의 개성이 살아 있다.
일례로, 수퍼맨이 크립토나이트보다 더 나를 약하게 만드는 게 있다고 하는 부분의 대사는
히어로들을 어줍잖게 알아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명대사...
정말로, 히어로들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으면 있을수록 대사나 상황들이 깊은 맛으로 다가온다.
-일종의 코멘터리나 후기 성격의 내용이 권말에 실려 있는데, 꽤 볼만하다.
-사실 범인의 윤곽을 어느 정도까지 좁히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야기의 진행이 계속 힌트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인의 정체나 목적이 드러나는 건... 덜덜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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